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72) 감독이 최근 은퇴를 선언하면서 '바람이 분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 극장가에서 7월20일 개봉 이래 7주 연속 1위를 달리며 하야오 감독의 자국 내 영향력을 새삼 확인시키고 있다.
극중 관동대지진과 불경기로 힘들어하는 1920년대 일본인들의 모습은 2013년을 살면서 또 다시 동일본대지진, 불경기 탓에 어려움을 겪는 현실의 일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외치며 자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서 일본제국을 기억하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관객들이 이 작품을 봤을 때 느끼게 될 감정은 크게 다를 듯하다.
바람이 분다는 실존인물인 일본의 비행기 설계사 호리코시 지로(1903-1982)의 꿈과 열정을 그린 작품이다.
판타지 요소가 강했던 기존 하야오 감독의 작품과 달리, 1920년대라는 시대 배경은 물론 시퀀스를 그대로 실사영화로 옮겨와도 무방할 만큼 사실적이다.
하야오 감독은 이 작품에다가 호리코시 지로와 같은 시대를 산 작가 호리 타츠오(1904-1953)가 쓴 동명의 소설 속 로맨스를 입혔다. 극중 지로와 연인 나오코의 사랑은 극단의 시대를 이겨내는 힘으로 그려진다.
호리코시 지로는 근대화된 일본에서 살면서 비행기로 하늘을 나는 꿈을 가진 소년이다. 길을 가다 친구를 괴롭히는 또래 학생들을 혼내 줄 만큼 정의감도 지녔다.
매번 꿈속에서 만나는 이탈리아의 비행기 제작자 카프로니 백작은 어린 지로에게 "비행기는 전쟁의 도구도, 장사의 수단도 아닌 아름다운 꿈"이라고 전한다.
청년이 된 지로는 관동대지진으로 쑥대밭이 된 도쿄에서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비행기 설계사의 꿈을 키운다. 그리고 미쓰비시중공업에 들어가 비행기를 개발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 비행기는 군비 경쟁에 열을 올리던 일본군의 전투기로 쓰일 터였다. 지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자신의 꿈인 최고의 비행기 개발을 향해 달려간다.
하야오 감독은 바람이 분다를 통해 극단의 시대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은 자신의 꿈을 향한 정진과 인간애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기존 작품을 통해 반전 메시지를 전해 왔던 그이기에 전체주의로 치닫는 지금 일본을 비롯한 세계 정세를 경계하라는 말로도 확장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인식은 일본, 최대한 넓혔을 때 미국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소위 강대국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머무는 모양새다.
20세기의 가해자 일본제국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피해자로서 한국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이라는 인상을 주기 십상이다.
전 세계를 전쟁과 학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독일 나치, 일본 군부가 비판받는 것은 국가의 명령이라는 대의명분에 취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치와 신념을 버렸다는 데 있다.
인류사에서 이러한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선행돼야 하지만, 머리 숙여 사죄한 독일과 달리, 일본 정부에게서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바람이 분다의 일본 개봉 직후 하야오 감독은 현지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담으려는 모습으로 비쳐진 이유는 무엇일까. 세계 애니메이션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그러한 외침을 미처 전하지 못한 거장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자연과 인류의 공존, 무한한 인류애의 메시지를 전해 온 일본의 지성 하야오 감독. 그가 마지막 작품에서 일본인으로서의 한계를 보이며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이기를 포기한 데 커다란 아쉬움이 남는다.
5일 개봉, 상영 시간 126분, 전체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