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인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 계단에는 거대한 태극기가 휘날렸다. 카메라를 대동한 언론사들과 보수 유튜버들이 원으로 빙 둘러선 계단 밑은 평소와 달리 다소 소란스러웠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설치된 단상에는 '끝까지 대한민국! 국민 First! 국익 First!'라는 슬로건이 붉은 글씨로 적혔다. 행사를 기다리는 청중들은 대체로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기온이 영상 20도를 오르내린 땡볕 속에서 캡모자를 눌러쓴 한 어르신은 "의리가 없는 정치는 안 되지"라고 중얼거렸고, 동행은 "그럼 그럼"이라며 공감의 추임새를 넣었다.
오후 2시가 임박하자, 사회자는 주인공의 이름을 거명하며 청중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잠시 후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전 공지사항을 다시 한 번 전달 드리겠습니다. 지지자 여러분께서는 원활한 진행을 위해 안내자의 안내에 따라 질서 유지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공직선거법 준수를 위해 연호 제창은 삼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밝은 톤의 초록색 정장 차림으로 등장한 나 의원은 이내 마이크를 들고 제21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나 의원은 비장한 목소리로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저는 오늘,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갈림길 위에서 무거운 책임감으로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대표적 반탄(탄핵 반대)파로서 수차례 관련 집회 연사로 나서고, 헌법재판소 앞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기각·각하'를 주장해온 그는 출마를 결심한 배경으로 '체제 수호'를 꼽았다.
나 의원은 "헌정사상 두 번째 대통령 탄핵이라는 국가적 비극 앞에서 무너지는 법치주의와 쓰러져가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시민 여러분, 당원 동지들과 함께 간절하게 싸웠다"며 "그러나 거대 의석의 의회폭주와 기울어진 사법시스템 속에서, 우리의 외침은 닿지 못했고, 결국 참담한 결과를 마주해야 했다"고 밝혔다.
대통령 궐위 등 현 위기의 본질은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의회 독재'에서 비롯됐다는 논리다. 그는 "견제받지 않는 다수 의석은 '다수결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오만을 낳았다"며 민주당을 히틀러의 '나치'에 빗댔다.
따라서 이번 대선은 '체제 전쟁'이나 다름없다며, "'우리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이냐, 아니면 반(反)자유·반헌법 세력에게 대한민국을 헌납할 것이냐'(가 걸린) 제2의 6·25전쟁, 건국전쟁"이라고 주장했다.
나 의원은 또 윤 전 대통령 파면으로 인해 치르게 된 조기 대선을 두고 "'이재명 민주당'에 의해 획책됐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 집권기간 민주당이 "무려 178번의 (정권)퇴진 집회를 열고, 30번의 줄탄핵 시도, 23번의 특검법 발의, 38번의 거부권 유도 전략법안을 강행했다"며 여야 대치의 원인을 모두 민주당에 돌리기도 했다.
이는 앞서 윤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할 때 포고령으로 국회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한 근거와 흡사하다. 당시 그는 "자유민주주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시키는 괴물이 된 것"이라며 '반국가세력 척결 및 자유헌정 질서 수호'를 계엄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나 의원은 그러는 동시에 자신이 '필승 후보'인 이유로 '5선의 의회주의자'란 점을 들었다.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를 가리켜 "누가 이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워 대한민국을 지켜낼 수 있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데 늘 앞장서 왔던 저 나경원"이라고 했고 "우리 국민의힘이 재집권하더라도 여전히 소수여당으로 무도한 거대야당을 상대해야 한다. 의회를 알지 못하고 정치를 모르는 사람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루 앞서, 국회에서 출사표를 던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등을 겨냥한 표현으로 풀이된다. 그는 "국회 경험이 가장 많고, 여야(與野)와 공수(攻守)를 모두 경험한 준비된 실력을 갖춘 유일한 후보인 제가 여러분의 자랑스러운 선택이 될 것"이라며 "압도적인 본선 승리로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약으로는 △'대통령 4년 중임제·책임총리제 도입' 개헌 △'민주당 입맛에 맞춰 정치보복의 칼을 휘두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즉각 폐지 △'채용비리'·'소쿠리투표'로 국민 불신을 초래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개혁 △북핵 완전 폐기를 위한 '자체 핵무장' 등을 언급했다.
나 의원이 "이재명 대표가 말로만 하던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도 저는 해 내겠다"고 발언한 순간에는, 지지층 사이 큰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인구위기와 관련해선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낼 당시, 제안했던 헝가리식 '신혼부부 대상 3억원 초저금리 대출' 등의 카드를 재차 꺼냈다.
이어 마지막으로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이 간절한 외침에 여러분의 힘을 모아 달라.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
다만, 나 의원은 '의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정치 복원'을 이루겠다는 약속과, 계엄사태 당시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막지 않았던 점 등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의견은 다양하니까 이 정도로 하겠다"며 답변하지 않았다.
지지자들은 해당 질문을 던진 기자를 향해 "질문 좀 똑바로 해" 등의 고성을 지르기도 했다.
한편, 헌재 선고 후, 윤 전 대통령을 면담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출마를) 결심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날 한남동 관저에서 나와 서초동 아크로비스타로 거처를 옮긴 윤 전 대통령 예방 계획을 묻는 질문에도 "지금까지 확정된 것은 없다"고 답했다.
이날 회견에는 같은 당 한기호·이종배·송언석·이만희·강승규·강대식·이인선·김민전·서명옥·임종득 등 10여 명의 의원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