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개발을 위한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확보전에서 국내 이동통신사들이 관련 계획이나 검토 입장을 밝히면서 적극적인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확한 '현 위치 파악'은 쉽지 않다. 단적인 예로, 업계 전반적으로 보유한 GPU 칩 모델과 양, 나아가 구체적인 확보 목표 모델과 수량 등 '수치'에 관한 언급은 좀처럼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
정부 차원에서 '2027년까지 3만 장 확보'를 목표로 내세울 정도로 국내 GPU 부족 문제는 심각하지만, IT, ICT 등 관련 민간 분야의 정확한 보유량은 깜깜이 상태인 것이다. 왜 그럴까?
경쟁력과 직결되는 'GPU 현황'…말 아끼는 업계
19일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 정보통신업계를 비롯한 산업계의 공통된 화두는 AI다. 통신사들 입장에서도 GPU는 자체 AI 개발은 물론, 다른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구독형 서비스인 GPUaaS(GPU as a Service) 사업 등 미래 먹거리 개척의 핵심 요소다.
다만, 각 사는 GPU 보유 현황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공식화하고 있진 않다. 그 자체가 민감한 영업 기밀이란 이유다.
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GPU 보유량, 모델 자체가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된다"며 "거래 상대 입장에선 해당 업체의 보유 현황이 당장 서비스의 질은 물론, 앞으로 최신 GPU 확보 능력까지 가늠해 볼 잣대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엔비디아는 일찌감치 블랙웰 아키텍처에 이어 베라 루빈, 파인만 등 후속작을 예고해 뒀는데, 이 같은 기술의 급속한 변화와 이에 따라올 수급난 문제도 언급을 조심스럽게 하는 요소다. 현재 SK텔레콤은 올해 2~3분기 블랙웰 도입을 공식화했고, KT 역시 블랙웰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지만, 전 세계가 엔비디아와 사업 협력에 달려드는 상황이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구입하려고 계획해도, 구입할 자금이 있어도, 현재 시장에서 못 구하는 측면이 있다"며 "업종을 불문하고 전반적으로 보유량이 적다는 점도 언급이 부담스러운 이유가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수급난이 예민한 문제인 만큼, 공급사가 계약에서부터 기밀을 요구했을 수 있단 견해도 있다.
숫자 맹신은 무의미…"집적화 등 인프라, 구조적 이해부터"
다만, 이를 지나치게 수치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기보다는 AI의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통합된 인프라 형성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부 김정호 교수는 "칩이 몇 개든 여러 곳에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다면 별 의미가 없다"며 "하나의 데이터센터에 집적해 광통신으로 연결되고, 그 위에 소프트웨어가 얹어져 동시에 몇천, 몇만 대가 학습하고 서비스할 수 있는 하드웨어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다면 따로따로 있는 지표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데이터센터가 대형화되면 전력 사용량이 기가와트 규모가 되니, 원자력발전소 하나를 또 세워야 할 정도"라며 "AI를 국가적 사업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고려대 인공지능연구소 최병호 교수 역시 "밸류체인 관점에서, 밑바탕에 GPU와 전력‧용수 문제에서부터 그에 맞는 클라우드 소프트웨어와 관련 인력 등 장치산업이 기본이 돼야 하고, 그 위에 데이터가 필요하고, 그 위에 앱과 서비스가 얹어지고, 그 위에 또 이를 응용하는 산업 생태계가 마련돼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걸 육성하고 동시에 규제하는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필요하다"며 구조적 관점에서 산업을 들여다보는 것을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지난 18일 임시국무회의에서 심의한 추가경정예산안을 통해 1조 8천억 원 규모 AI 예산 편성 방침을 밝혔다. 지난해 말 감액 예산과 비상계엄, 탄핵 등 정치적 파고 속에서 우선 '급한 불 끄기'라도 하는 셈이다.
이 중 대다수인 1조 5천억 원은 엔비디아 호퍼(H200)‧블랙웰 1만 장 분 확보에 쓰일 계획이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할 AI 모델·서비스 개발사를 뽑는 '월드 베스트 거대언어모델(WBL)' 프로젝트, AI와 과학기술을 융합한 분야의 국내외 우수 박사후연구원 처우 지원 등에 관한 예산도 편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