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살포기로 추정되는 도구를 화염방사기 삼아 서울 한복판 아파트에 불을 지른 충격적인 방화 사건이 일상을 할퀴고 간 뒤 피해 아파트 주민들은 "생활이 힘들다"며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화재의 트라우마는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며 이들의 상처 회복을 위한 꼼꼼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피해 아파트 주민들 "큰 소리 나면 깜짝 놀라…청심환 먹기도"지난 21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아파트에서 60대 남성 이모씨가 농약살포기로 추정되는 도구를 화염방사기 삼아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피의자 이씨는 사망하고 불이 난 4층에서 2명이 전신화상을 입고 추락하는 등 6명이 다쳤다.
이처럼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지 사흘이 지난 24일, 불이 났던 아파트 곳곳엔 새까만 재가 쌓여있었다. 주민들은 그 앞을 지나가다 잠시 멈춰서 창문이 까맣게 탄 4층을 올려다보고 갔다.
"트라우마가 말도 못해요".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아파트로 들어가던 주민 방모(77)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 같이 말했다. 방씨는 "고층으로 올라가기가 두렵다. 잠시 병원에 누워있을 때에도 10층에서 불 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사건 이후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주민들도 많았다. 방씨는 "1시간에 1번씩도 깬다"며 "청심환을 먹고 있다"고 했다. 불이 났던 4층에 사는 김모(76)씨도 "혈압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 같아 잠을 못 잔다"며 "어제도 못 자고, 그제도 제대로 못 자서 눈이 아파 죽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옆에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깜짝 놀란다"고 일상 복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같은 층에 사는 또 다른 김모(70)씨도 "양 옆이 다 탔는데 거길 다시 어떻게 들어가겠나"라며 불안해 했다.
전문가 "이번 사건 특이성 고려하면 주민들 트라우마 심할 것"전문가들은 주거 공간에 대한 방화라는 특수성이 일반 화재보다 더 큰 트라우마로 연결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방화로 인해 (피해자와) 상관없는 집들까지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내게도 일어났겠다'라는 생각으로 주민들이 엄청나게 불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곽 교수는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가 간다는 점에서 '묻지마 범죄'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주민들의 트라우마가 (다른 범죄보다) 더 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나 이번 방화 사건은 사실상 화염방사기라고 볼 수 있는 낯선 도구가 이용돼 그 충격이 더 컸다. 단국대 심리치료학과 임명호 교수는 "주민들에게는 굉장히 큰,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며 "집을 옮겨야 할지 고민하거나,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봐 밤에도 잠을 잘 못 자는 불안 상태가 반복될 수 있다"고 했다.
"고령층 주민들에게 '찾아가는 상담' 등 적극적 심리 치료 지원 필요"
이런 분석과 맞물려 주민들에 대한 심리 치료 지원이 세밀하고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이번에 불이 난 곳은 고령층이 많은 임대 아파트동이었던 것으로 파악됐는데, 곽 교수는 "(고령층은 트라우마에 대해선) 문제가 있다고 인식을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게 더 위험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상담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하지 말고 '이번에 어려우셨죠'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청년층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된다"고 조언했다.
임 교수는 "상담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활동이 있다는 것들을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봉천동 방화 사건 이후 관악구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서울시 마음안심 버스'로 피해 아파트를 찾아가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2일 10시부터 3시까지 운영됐고 29일에도 같은 시간 상담이 이뤄질 예정이다. 대한적십자사도 지난 22~23일 아파트 경로당 앞에서 주민 20명을 상담했다.
피해자 가족 "안전한 공간이 공포의 공간으로"…경찰, 보복 범죄 여부 수사한편 경찰은 이번 방화 사건 피의자가 숨졌지만 관련 수사는 이어가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유관기관과 현장감식, 부검을 했으며 피의자 휴대전화 포렌식 분석도 진행 중이다. 특히 작년 11월까지 해당 아파트에 거주했던 피의자 이씨가 바로 위층에 사는 4층 이웃에게 층간소음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파악돼 보복범죄일 가능성을 무게를 두고 구체적인 범행 경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이씨와 층간소음 문제로 갈등을 겪었던 이웃 여성은 현재 중상을 입고 입원 중이다. 피해자의 아들 정모씨는 25일 기자들과 만나 "하루 아침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공간이 두려움과 공포의 공간이 됐다"며 참담한 심경을 밝혔다. 그는 이날 일부가 까맣게 그을린 피해자의 슬리퍼를 공개했다.
그러면서 "추석 때 집에 와보니 (혼자 사는) 어머니가 슬리퍼를 신고 생활하고 계셨다"며 피의자 이씨의 층간소음 문제 제기는 무리한 주장이었다는 취지로 반박했다.